[마음의 소리] 아버지도 때론 외롭고 우울하단다, 가면성 우울증

바야흐로 ‘백세시대’다. 의학과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인류의 수명은 과거 20세기 동안과 비교하여 극적으로 늘어났다. 2017년 발간된 영국 의학저널 <Lancet>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의 기대 수명은 90세, 한국 남성은 84세로 남녀 공히 세계 1위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추세라면 한 세기가 채 걸리지 않아 인간의 기대 수명이 100세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과거에는 중요시했던 환갑잔치를 요즘에는 생략하는 경우도 많지 않는가.

기대 수명과 노년층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각 연령대의 역할과 그에 따른 기대도 변화하고 있다. 중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에는 중년을 인생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황금기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와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시기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년의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인생의 클라이맥스가 아닌 노년기로 이행되는 과정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징검다리와 같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아버지 상에 대한 틀에 박힌 인식’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전통적 중년의 모습들이 나온다. 동일(성동일 분)은 모친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차분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의연한 모습에 가족들은 의아해 한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귀국한 형을 마주하자마자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한다. 그 뒤로 덕선(혜리 분)의 내레이션이 나지막하게 깔린다. “어른들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동일의 모습에서 우리네 아버지가 오버랩 된다. 짊어진 책임감 때문에 아픈 기색을 쉬 내비치지 못하는, 그러면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중년들.

심리학자 에릭슨(Erik H. Erikson)은 인생의 단계에 따라 달성해야 할 과업을 분류했다. 우리가 흔히 중년이라 일컫는 40~50대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의 생산성(productivity)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이 시기의 남성들은 커리어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직장에서는 관리직의 역할을, 집에서는 아이들과 아내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며 충실하게 이 과업을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생산성이라는 허울의 이면에는 건강하게 분출되지 못한 억눌린 감정들이 있다. 이른바 ‘생산성의 덫’이다.

중년의 우울증은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에 가깝다. 우울 증상이 드러나지 않고 식욕 부진, 가슴 두근거림, 피로감 등의 다른 증상들로 가려져 있는 것을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한다. 이때 환자 자신은 우울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울증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가면성 우울증은 정신의학에서 사용하는 정식 진단명은 아니지만 임상에서는 우울증의 아형(subtype)으로 여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가면성 우울증은 중년 이상의 나이에서 더 잘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건강한 중년의 삶을 위한 지침들
행복하고 건강한 중년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작은 시도들이 습관을 만들고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도움이 될 몇 가지 지침을 소개한다.

1) 감정 표현하기: 슬픔, 초조함, 분노 등 모든 감정은 제때, 그리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복적인 연습만이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다. ‘화가 난다’는 감정만 거칠게 표현하거나 ‘나를 이해해 달라’는 요구만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 ‘○○한 상황 때문에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나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요구를 담담하게 이야기하자. 이는 감정 표현과 동시에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한다.

2) 감정 일기(Emotion diary) 쓰기: 감정 변화를 겪었던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우울, 불안, 분노 중 하나), 당시의 생각과 신체 반응을 적어 보자. 그리고 그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적절한 감정 표현 방법을 고민해 보자. 부부간에 혹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 감정 일기를 공유해 피드백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커뮤니티 또는 취미 활동하기: 피상적이고 격식만 차리는 모임이 아닌, 마음을 편하게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가지도록 하자. 소속감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마당이 될 것이다. 평생의 취미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악기, 운동, 공예 같은 예술 활동들에 열중하는 행위는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수동적인 삶에 성취감과 더불어 내면의 깊이를 더해준다.

4) 삶을 부부 위주로 재편하기: 중년기에는 자녀 중심의 삶에서 부부 중심의 삶으로 가정의 형태가 재편되어야 한다. 부부간에 정서와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 취미생활을 함께 하거나 공통의 모임을 가지는 것도 좋다. 이것은 독립을 앞두고 있는 자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 아버지의 모습이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자신을 조금 더 드러내고 억눌렸던 감정의 압력을 조금씩 빼내자. 가족과 주변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만이 건강한 노후의 해답이 될 것이다. 혼자서 실천하기 힘들다면, 혹은 우울증 증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내가 발견하지 못한 등잔 밑의 그늘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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