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괴질, 호열자라 불리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콜레라’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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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는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의 감염에 의한 전염성 질환이다. 급성 설사가 유발되어 중증의 탈수 상태가 되며,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현재는 적절한 항생제 치료로 완쾌할 수 있는 질병이 되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콜레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괴질, 쥣통, 그리고 고양이
19세기 콜레라는 어디든 느닷없이 다가와 삽시간에 온 마을을 휩쓸어버렸다. 이 질병은 남녀노소, 신분, 계층, 학력, 직업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덮쳤다. 높은 전염율과 치사율에 비해 예방 및 치료방법이 없어서 인류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인 1821년 8월 13일(음력) 평안도에서 조정에 올린 계장(啓狀)에 의하면, 평양에서 콜레라에 전염된 백성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었다. 1858년에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창궐해 50여만 명이 죽었고, 1886년과 1895년에도 수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콜레라의 제물이 되었다.

△ 콜레라균 (출처: 위키미디어)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처음 발병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질병이라는 뜻으로 괴질(怪疾)이라 불렀다. 그러다 차차 ‘쥣통(痛)’이라고 했다. 쥐가 잠자고 있는 사람의 다리를 갉고 올라와 배에 다다를 때 쥐 귀신이라는 악귀가 몸 안으로 스며들어 뱃속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의 천적인 고양이의 영혼에 기도하고, 대문이나 방 안에 종이로 만든 고양이나 고양이 그림을 붙였다. 경련이 난 곳을 고양이 가죽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19세기 말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은 이를 두고 대단히 어리석다고 비꼬았다. 그런데 서양인들 역시 콜레라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을 때는 우리 백성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콜레라를 사악한 악마가 퍼뜨리는 독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공포에 질려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죽이기도 했다.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신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징벌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해야만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십보 백보였다.

호열자 극복의 주인공들
대한제국시기에도 콜레라의 습격은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 암울하기만 하던 1909년 7월 말 부산과 청주에서 콜레라 환자가 나타났고, 9월 초순에는 서울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 공무원, 군인, 학생, 인부, 관광객 등 너나없이 차례로 쓰러졌다. 9월 26일까지 전국에서 503명이 숨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관청 업무시간은 단축되었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각종 토목공사는 중단되었고, 시장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콜레라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기차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 1919년 콜레라 유행 당시 황해도 겸이포의 임시 격리병사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호열자는 본래 한국에서 쥣통이라 칭하던 괴질이니, 이 병에 걸리면 완연히 쥐 같은 물건이 사지(四肢)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 같으며, 운신(運身)도 임의로 못하고 뼈만 남아 죽는 고로 쥣통이라 했다. 이 병이 한 집에 들어가면 한 집의 사람이 거의 다 죽고,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칡덩굴같이 뻗어가며 일거에 일어난 불과 같이 퍼져간다.” (대한매일신보, 1909.9.24.)

이 무렵 콜레라는 호열자라 불렸다. 중국에서 콜레라를 한자로 표기해 호열자라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그 이름을 따라 쓴 것이다. 호열자(虎列刺)는 호랑이가 물어서 살점을 찢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들의 고통과 다행히 살아남은 백성들의 공포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가는, 무시무시한 이름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10월 들어 환자는 크게 줄었고, 12월에 콜레라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관공서, 학교, 시장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1910년 1월 집계 결과,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1262명이었다.

그래도 이 피해는 1886년, 1895년 두 차례 콜레라로 수만 명이 숨진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통감부의 강압적 방역도 주효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 신문들의 맹활약 덕분에 한국인의 위생의식이 높아진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예로 황성신문은 콜레라 예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호열자는 병자의 대소변이나 토사물에 포함되어 있다가 타인의 의복이나 물, 음식물 등을 통해 전파된다.

1. 콜레라 병독을 가장 빠르게 전파시키는 것이 냉수이니 식수는 무조건 끓여 먹고 세면, 식기 세척, 세탁 등에도 깨끗한 물을 골라 사용할 것.
2. 식수 이외의 음식물도 반드시 익혀서 먹을 것. 찬밥이나 익히지 않은 채소를 먹지 말 것. 감염된 환자의 집이나 그 부근에서 만든 음식은 손대지 말 것.
(황성신문 1909.9.25.)

또한 대한제국 정부와 ‘의학교(醫學校)’(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는 ‘호열자예방주의서(虎列刺豫防主意書)’를 보급하는 등 보건위생 사업을 펼쳤다. 개화 지식인들과 김익남, 유병필, 김필순 등 의사들은 위생지식 보급과 민중 계몽에 헌신했다. 이들 모두가 호열자 극복의 공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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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상태
편집_박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