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천연두, 신의 영역에서 의학의 영역으로

20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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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인류에게 큰 불행을 안기던 전염병 중에 천연두(두창, 痘瘡)가 있었다. 두창에 감염된 영아, 유아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두창에 걸린 아이들이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성장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은 계속되었다. 두흔(痘痕, 곰보)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소년기에 또래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남성은 어른이 되면 큰 문제는 없었으나 여성, 특히 결혼 적령기에 달한 여성에게 곰보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결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두창을 ‘손님’ 또는 ‘마마’라고 불렀다. 가족 중에 두창이 발병하면 환자에게 귀신이 들어온 것이라 여겨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였다. 굿을 할 때 그 귀신이 환자에게 온 손님이니까 고이 모셔 내간다고 하여 손님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며, 궁중에서 국왕이나 비빈(妃嬪)을 마마라고 부르듯이 귀신에게 극존칭을 써서 마마라고 한 것 같다. 당시 무당들은 저마다 두창신을 모셨다. 대개 두창신은 몸집이 크고 험상궂게 생겼으며, 칼이나 창, 활 같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두창은 의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 즉 종교적 영역에 속했다. 그만큼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이었던 것이다.

△두창신

눈썹이 세 갈래인 아이
1762년 한강 상류의 한 마을(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이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에 천자문을 익혔고, 일곱 살에 한시(漢詩)를 지었으며, 열 살도 안 되어 시집을 냈다. 그런데 그 시집의 제목이 참 희한했다. “삼미집(三眉集)”, 눈썹이 세 갈래라는 뜻이다. 이 아이는 수많은 어휘들을 제쳐두고 왜 하필 ‘삼미’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정했을까?
이 아이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두 살 때 두창(痘瘡, 천연두)을 앓았는데, 그때 한 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 그 덕에 또래집단에게 ‘삼미자(三眉子)’라는 놀림을 받고 자랐고, 일곱 살 때부터는 아예 스스로 ‘삼미자’를 호로 사용했다. 자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콤플렉스를 당당히 이겨낸 덕분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그는 1798년 홍역에 관한 의서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두창의 해결방법으로 우두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두창하면 떠오르는 이 사람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의 대명사 격인 다산 정약용이다.

‘조선의 제너’ 지석영
지금까지 문헌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시술한 사람은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다. ‘유아의 신’, ‘조선의 제너’라 불린 그는 185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이어서 정식 의학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 서적을 탐독했는데, 특히 제너(E. Jenner)의 종두법에 관심을 가졌다.

△지석영(1890)과 개항기의 종두침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스승인 박영선이 일본에 건너가게 되자, 지석영은 스승에게 간청하여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입수한 후 종두법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1879년 두창이 유행하면서 조카딸이 목숨을 잃자, 종두법 보급의 절박함을 더욱 느끼고 일본 해군이 부산에 개설한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웠다. 같은 해 12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충주 처가에 들러 두 살 난 처남에게 종두법을 시술하여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최초로 종두법이 시술된 것이었다. 두창이 신의 영역, 종교의 영역에서 사람의 영역, 의학의 영역으로 바뀐 것으로서 한국 근대의학의 출발점이자 한국 의학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무당들의 반격
지석영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痘苗)의 제조, 저장법 등을 배운 뒤 두묘 50병을 얻어서 귀국했다. 그는 곧바로 서울에 종두장을 차리고 두묘를 만들어 우두접종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굿하는 장면(1904)

당시 지석영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무당들이었다. 당시에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이라도 가족 중에 두창이 발병하면 용한 무당을 모셔와 굿을 했다. 그렇다 보니 지석영은 무당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무당들은 지석영에게 서양 귀신이 씌었다거나 그가 두창신에게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당들의 말에 동조하는 백성들도 많았다. 급기야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서울 장안이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지석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무당들과 군중은 그의 종두장에 몰려가 불태워버렸다.

종두법 보급을 향한 지석영의 집념
다행히 정국이 수습된 후, 지석영은 전주와 공주 등 지방 대도시에 설치된 우두국에서 종두법을 널리 보급했다. 1885년 종두에 관한 지식과 실제 경험을 망라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으며, 1893년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유아들에게 종두법을 시술했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종두술을 습득, 시술한 사람이 지석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유독 지석영이 기억되고 존경받는 것은 그의 종두법 시술과 보급이 양적으로 많았고, 질적으로 우수했으며,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즉 종두법에 대한 지석영의 집념과 헌신이 압도적이었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종두법에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선구자, 지석영
1895년 조선 정부는 서양의학 교육과 의사 양성을 위해 의학교 설립계획을 세우고 예산도 편성했으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실현하지 못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 의학교 설립을 건의했는데, 이때는 정부가 예산부족을 이유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때 지석영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학부대신(學部大臣) 이도재에게 청원서를 올려서 의학교의 교수 확보, 학생 선발 및 교육, 졸업생의 활용 방안 등 총체적인 운영방안을 제시했다. 이틀 후 이도재는 “내년에 의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 지석영의 의학교 교장 임명장(1899)

마침내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3월 24일 ‘의학교 관제’를 반포하고, 3월 28일 지석영을 교장으로 임명했다. 국내 최초 정규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으며, 교과목은 동물, 화학, 해부, 약물, 내과, 외과 등 16과목이었다. 그러던 1902년 7월 4일, 마침내 19명의 학생들이 최초로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국내에서 사상 최초로 근대식 의사들이 배출된 것이다. 결국 지석영은 국내 최초 정규 근대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 의사를 배출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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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상태
편집_박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