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의 노트] 봄, 경주, 역사유적지구

2018.04
조회수 269
추천수 14

벚꽃 흐드러진 4월의 경주, 화려하게 피어난 봄꽃들 사이로 역사유적들의 자태가 더욱 빛난다. 992년 간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는 찬란했던 1,000년 고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들이 많이 있다. 신라의 숨결을 음미하듯 천천히, 역사유적지구 안의 첨성대, 대릉원, 동궁과 월지 등을 돌아보았다.

첨성대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둠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별빛에 매료되기도 하고, 광활한 우주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신라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들은 첨성대에 올라 천체를 관측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첨성대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치세 때 건립한 건축물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해시계 혹은 달력의 개념이었다는 것 등이다. 이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대였다는 주장이다. 첨성대가 세워진 후 삼국사기에는 일식과 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이변 등의 관측이 예전보다 많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첨성대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김경애 문화해설사. 그녀가 보여준 그림파일을 보면 신라인들이 첨성대에 올라 천체를 관측한 방식을 추측해볼 수 있다.

첨성대에는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우주사상이 담겨있다. 사각형의 이중 기단 위에 27단의 벽돌들이 원주형으로 쌓아져 있는데, 여기서 신라인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 우주론을 엿볼 수 있다. 첨성대는 정확하게 동서남북으로 방향이 나있는데, 정남향에는 네모 모양의 출입구가 있다. 이 출입구 아래에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로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7m로, 실제로 보면 규모가 그리 크진 않다. 하지만 건립 당시에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높은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안정적인 모양으로 곡선을 그리는 첨성대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신라인들의 격조 높은 심미안에 감탄하게 된다.

대릉원
경주 대릉원 일대는 미추왕릉을 비롯해 천마총, 황남대총 등 신라 초기 고분 3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분들의 특징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명칭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뜻을 이해하면 쉽다. 땅을 다지고 그 위에 시신을 넣은 나무 목곽분, 장신구 등이 담긴 부장품 상자를 두어 하나의 방처럼 꾸몄다. 그 방을 다시 나무 덧널로 덧댄 뒤 냇돌을 단단하게 쌓아올렸다. 냇돌을 사용한 이유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다. 냇가에 있는 냇돌은 모난 곳 없이 둥글다. 각진 돌은 쌓아올리면 잘 무너지지 않지만, 둥근 돌은 3~4개 정도 꺼내면 우르르 무너진다. 도굴로부터 무덤과 보물들을 지키기 위한 지혜가 돋보인다. 돌무지 위에 방수제 역할을 하는 진흙을 바른 다음 봉토를 덮은 것이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출입구 없이 무덤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추가로 매장을 할 수 없다. 이런 구조에 추가로 매장을 하기 위해 2개의 봉분을 붙여 쌍무덤으로 만든 대표적인 무덤이 황남대총이다. 남분(오른쪽)에서는 60대로 추정되는 남성의 유골이, 북분(왼쪽)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왕과 왕비의 부부장으로 추측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겉으로 보면 동산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도굴 위험 없이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거대한 무덤의 내부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돌담길을 따라 소나무 숲길로 이루어진 대릉원 일대를 거닐었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야외에 설치된 음향시설에서 국악 가락이 흘러나와 고즈넉한 운치를 더해주었다.

교촌한옥마을
대릉원에서 나와 교촌마을로 향했다. 교촌마을은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한옥마을이다.

△경주 최씨의 후손들, 이분들을 만난 덕분에 경주 교촌마을이 조금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오니 맞은편에 인자한 미소를 띤 아저씨가 만두를 굽고 있었다. 노릇하게 익은 군만두를 한두 개쯤은 먹고 싶었지만 한판을 다 먹을 자신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인지, 아저씨가 군만두를 하나 주면서 맛보라고 했다. 그렇게 말이 트였다. 경주 최씨 후손인 그 아저씨는 경주 교촌마을과 최부자 집에 대해 설명해주며 400년 된 서당이 있는 ‘석등이 있는 집’을 소개해주었다.

석등이 있는 집에 도착해 정원의 경치에 감탄하고 있는데, 이 집의 주인인 두 번째 아저씨가 나타났다. 석등이 있는 집은 고택 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정원이 특히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정원에는 350년 된 모과나무부터 200년 된 탱자나무와 산수유까지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온 고목들이 자리하고 있다.

△ 정원의 꽃나무에도 어서 봄이 내려앉길…. 왼쪽에 보이는 곳이 400년 된 서당이다.

석등 집 주인의 추천으로 향한 다음 행선지는 ‘경주 최씨 고택’이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경주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부자 집은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이다. 최부자 집이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최부자 집의 훌륭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부자 집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 것, 1년에 생산되는 쌀의 3/1은 사용하고 3/1은 찾아오는 과객에게 대접하고 나머지는 주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최부자 집을 안내해주는 세 번째 분에게서 자신이 최부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경주에서 맛본 집밥
신경주역에 도착했던 시점으로 돌아가, 첨성대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께 ‘경주에서 꼭 가봐야 할 맛집’을 물었다.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아주머니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아주머니는 경주 시내에서 밥집을 운영하는 분이셨다. 그 인연으로 여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수가성으로 향했다.

식사하는 동안 아주머니는 좋은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했던 아주머니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고. 매일 아침 겉절이를 무치고, 사과와 배를 갈아 물김치를 만든다고 말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동궁과 월지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월지는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삼국사기에는 ‘궁 안의 못’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신라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연못을 찾은 한 시인이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고 쓴 시 구절에서 비롯됐다. 기러기 ‘안(鴈)’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렸다.

동궁과 월지는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서 200m, 남북 180m 정도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굴곡이 많기 때문이다. 연못 안에는 세 개의 섬과 열두 봉오리를 꾸며 넣었다. 도교의 신선사상이 엿보인다. 날이 어두워져 조명이 켜지자 못에 투영된 건축물이 연못 수면에 비쳐 일렁이며 풍경이 더욱 그윽해졌다.

한때 연회를 베풀며 가장 화려함을 누렸던 이곳은 신라가 멸망하면서 잡초가 무성하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드는 적막한 곳이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은 경주시민들이 멱을 감고 낚시 하며, 겨울이면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던 장소였다. 지금은 경주의 야경명소로 손꼽히며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변하지만, 유적들은 변함없이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기원전 57년에 시작되어 서기 935년까지 992년 간 번영을 누린 신라의 찬란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경주. 여행하는 동안 천년이 넘는 시간의 벽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여행이 끝날 즈음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후대에게 어떤 역사와 문화를 남기게 될까.

 

글, 사진_박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