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누구일까?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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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미국 컬럼비안 의과대학(지금의 조지 워싱턴대학 의대) 졸업생들이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셋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졸업생의 이름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이름만 봐서는 여느 미국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보면 동양인임에 틀림없다. 비록 1890년 6월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지만.

△ 서재필(윗줄 왼쪽 세번째)의 컬럼비안의과대학 졸업사진(1892년)

한국인 최초 의사, 서재필
서재필(1864~1951), 한국 근대사에서 그만큼 강렬한 족적을 남기고 오늘날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과 함께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1896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해 문명개화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했다. 따라서 근대적 개혁운동가이자 당시 미국식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했던 인물로 손꼽힌다. 그러나 곱지 않은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일부 학자들은 서재필이 갑신정변 당시 일본을 끌어들인 점, 독립협회 활동 당시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열강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던 점을 지적한다. 또한 상류층 인사답게 상류층만을 위한 근대화와 개혁을 추구했다고 비판한다.

서재필에 대한 논란은 또 있다. 서재필은 1893년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 지석영이 한국 최초로 종두술을 시술한 것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당시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아무튼 서재필은 어떻게 의사가 되었을까.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때 고국에 남은 가족은 모두 죽었다. 부모님, 형,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참형되었다. 두 살 난 아들은 굶어죽었다. 미국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서재필은 온갖 슬픔과 좌절감을 딛고 일어나 미국에서 7년 간 고학을 하며 눈물겨운 삶을 살았다. 1892년 컬럼비안의과대학 야간부를 졸업해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가필드(Garfield)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1893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된 것이다.

1895년 12월, 서재필은 고종과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고국에 돌아왔다. 11년 만의 귀환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역적’에서 ‘의사’로 변신해서 돌아왔다. 그의 직함은 중추원 고문이었고, 월급 300달러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한국인의 근대적 정치의식과 시민의식 형성에 기여했는데, 이때 의사답게 독립신문에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의 측근들과 외세의 방해를 받아 조국 근대화의 꿈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인 최초 여의사, 박에스터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누구일까. 바로 박에스터다.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으로 1876년(또는 18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교사 스크랜턴(미국감리회 의료선교사,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의 일을 돕던 아버지의 권유로 이화학당에 다녔는데, 특히 영어를 잘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면서 세례를 받고 에스터(Esther)가 되었다. 미국감리회가 세운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영어를 통역하며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다.

어느 날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언청이 수술을 보고 감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의사가 되려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는데, 10대 소녀가 홀로 미국에 건너가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1890년대 조선에서는 꿈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유학을 위해서 1893년 홀의 소개로 감리교 신자인 박유산과 결혼했다. 세례명이 에스터였던 그녀는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 박에스터 부부(1893년)

1894년 12월, 박에스터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뉴욕 리버티의 공립학교에서 의과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메릴랜드의과대학)에 입학해 4년 과정을 마치고 1900년 6월 졸업했다. 한국인 최초로 여의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졸업을 두 달여 앞두고 농장과 식당 등에서 일하며 아내를 정성껏 뒷바라지하던 남편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박에스터는 1900년 11월 홀로 귀국했다.

박에스터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서울의 보구여관과 평양의 광혜여원 등 여성 전문병원에서 여성 환자와 어린이 환자 진료에 전념했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산부인과, 내과, 소아과 진료를 본 것이다. 특히 하층민과 장애인 진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안도, 황해도 등 지방순회 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울러 구습에 사로잡혀 있던 농촌 여성들의 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과로는 역시 만병의 근원이었다. 그녀는 1910년 35세(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같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국내에서 탄생한 최초 의사들
한국 남녀 최초 의사인 서재필과 박에스터는 모두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나왔다. 1899년 김익남은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의과대학을 최초로 졸업하고 의사가 된 사람은 누구일까? 유병필, 김교준 등 1902년 의학교(醫學校,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제1회로 졸업한 19명이다.

1902년 7월 4일, 마침내 19명의 학생이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의사로서의 모든 자격과 권리를 인정받았다. 국내 최초로 근대식 의사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주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장병들의 질병 치료에 주력했고, 나아가 한국 사회에 근대의학을 정착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헌신했다. 19명의 국내 최초 의사들 가운데 족적이 가장 뚜렷했던 사람은 유병필과 김교준이었다.

△ (왼쪽) 관보에 실린 의학교 제1회 졸업생 명단(1902). 유(병)필(劉秉珌)과 김교준(金敎準)의 이름이 보인다.
△ (오른쪽) 국내 최초 의사 김교준의 군의관 시절 모습

유병필(1873~1928)은 1899년 다른 49명과 함께 의학교에 제1기로 입학해 서양근대의학을 공부했다. 3년 후 19명의 졸업생 중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의학교와 대한의원의 교관을 역임하며 의학교육에 매진했다. 1905~1910년 한국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때 의료계 인사 중에서 대표적으로 참여했다. 학회지를 통해 의학지식을 소개하고 위생계몽운동을 벌였는데, 특히 위생 정책의 의미와 정책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한국인 의사단체의 결성과 활동에도 기여했다. 1908년 서울 거주 일본인 의사들이 계림의학회를 조직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김익남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대한의사협회의 모태)를 결성하고 총무를 맡았다. 1911년 일본인 의사들이 조선의학협회를 결성하자, 1915년 한국인 의사단체인 한성의사회 창립에 기여하고 1921년에는 회장에 선출되었다.

김교준(1884~)은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은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제2대 교주 김교헌이었다. 김교준은 1899년 의학교에 입학해 1902년 유병필 등과 함께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명의 졸업생 중 최연소였다. 의학교 교관을 지내며 한국인 의사 양성에 매진한 후 육군 군의, 무관학교 의관 등을 역임하며 군진의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10년대에 김교헌을 따라 만주로 이주해 교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한편 대종교의 북간도지역 항일무장투쟁을 도왔다. 해방 직후 대종교 총본사를 국내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했고, 1962년 대종교 제5대 총전교(總典敎, 교주에 해당)에 선출되어 2년 동안 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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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상태
편집_박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