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 마음의 상처를 말하다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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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크고 작은 상처를 담고 살아간다. 저마다 간직한 상처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살면서 괴로웠던 기억 하나 없는 이가 세상에 있을까. 흔히 마음의 상처, 정신적 외상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표현한다. 트라우마는 사실 정신적 외상에만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다. 정신과 신체, 양쪽의 외상을 전부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트라우마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 분노의 감정과 뚜렷한 행동의 변화를 동반하는 극심한 마음의 상처를 말한다.

끔찍한 트라우마가 남긴 것들 : PTSD의 증상
강렬한 심리적 트라우마는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몸에서는 자동적으로 방어 시스템이 작동한다. 생존 위협을 겪는 인간의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 교감신경의 활성화를 통해 저장해 둔 에너지를 신속하게 방출해 순환시킨다. 또한 위협적인 상대로부터 도망치거나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팔다리의 대근육에 에너지와 산소를 빠르게 공급한다. 이와 같은 급속한 인체 내 반응에 맞물려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마치 100m 달리기를 한 듯 격렬한 심장박동과 숨 가쁠 정도의 호흡, 빠른 에너지 소진으로 인한 탈진이다. 다시 말해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생하는 본능적인 인체 반응은 괴로울 정도의 흥분과 과잉 각성이다. 문제는 외상의 정도가 강렬할수록 이 반응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잉 각성 상태가 지속되면 크고 잦은 감정 기복, 불안장애와 불면증 같은 심리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뇌의 여러 기억기관을 통해 저장한다. 우리의 경험은 뇌에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언제든 회상할 수 있는 안정적인 형태로 남겨진다. 잘 처리되어 저장된 기억 덕분에 우리는 언제든 지난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강렬한 심리적 트라우마를 입은 경우에는, 기억이 조각나고 왜곡된 채 불안정한 형태로 남겨지게 된다. 조각난 외상의 기억은, 당시의 경험을 회상할 수 있는 약간의 단서만으로도 마치 당시의 상황 속에 있는 것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자동차 충돌 사고의 후유증을 앓은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만으로도 사고가 났던 당시의 극심한 불안, 흥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적절하게 처리되지 못한 기억은 일상의 작은 단서들에 반응해 외상 피해자를 끊임없이 사고 당시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사고 상황을 회상할 때면, 현재와 과거가 구분되지 않고 마치 그 상황을 다시 겪는 것처럼 극심한 혼란과 공포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조각난 기억은 잠을 자는 도중 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외상 후 겪게 되는 증상 중 하나인 재경험(re-experience)이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과잉 각성, 흥분과 재경험의 고통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로 인한 반응을 피하기 위해 사고와 관련된 조그만 단서들을 회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관련 장소나 사물들을 피하고, 점차 외부 노출을 꺼리게 된다. 심한 경우 활동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잃고 칩거하기도 한다. 극도로 감정 노출을 억압하거나 감정이 쉽게 조절되지 않아 양극단을 오가기도 한다. 감정 자체가 무뎌져 왜곡된 생각들이 머리를 점령하기도 한다.

강렬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 위의 증상들이 1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로 진단할 수 있다. PTSD는 증상에 맞는 적절한 약물치료와 더불어 인지행동치료를 시행한다. PTSD의 경우 외상을 경험한 초기에 개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 만성화 과정을 밟게 된다.

트라우마의 회복을 첫 걸음 : 마음의 상처를 말하기
트라우마로 인한 삶의 변화를 잘 묘사한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 2012)>에서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데이비스가 등장한다. 그는 사고 직후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출근해 평상시처럼 업무를 보기도 한다. 마치 감정이 얼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데이비스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상처가 모두 회복된 것일까? 데이비스의 내적 감정은 잘 처리되고 치유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억압된 상태였다. 억압된 감정은 언제든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심한 트라우마는 감정이 표출되는 것을 억압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중추 활성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사건 당사자들이 외상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결국 트라우마의 치유는 얼어붙은 감정과 말을 풀어내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치료 방향이 된다. 트라우마에 초점을 둔 인지행동치료, EMDR과 같은 치료에서 외상 사건에 대한 억압되고 왜곡된 인지와 감정들을 표현하고 조절하는데 치료의 초점을 맞춘다.

이와 더불어 모든 상처의 치유는 이를 둘러싼 분위기가 중요하다. 얼어붙은 감정과 언어를 녹여내기 위해 온화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트라우마를 입은 이와 치료자 사이의 치료적 관계가 중요하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치유의 핵심은 사회 구성원들이 트라우마 당사자가 마음의 상처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 두려움을 견디며 트라우마를 온전히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최근 우리 사회는 안타까운 사회적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트라우마의 회복을 위한 방향을 함께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승섭 교수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된다면>에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이 참여한 치유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생존 학생들은 프로그램 내내 참사의 경험을 회상하고 이야기해야 했다.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자신의 상처를 말해야 했던 경험이 학생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참사 직후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생존 학생들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혼란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입은 상처를 감싸줄 만큼 사회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배려가 부족한 세간의 관심이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최근 미투 운동이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짧게는 수년부터 수십 년 간 숨겨올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처를 미투 운동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과거에 우리 사회는 성폭력을 당한 이들에게 은근히 그 책임을 전가해왔다. 부끄러운 일이라 치부하며 피해자들이 입을 열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이들은 처리되지 않은 트라우마의 조각들로 심한 내적 고통을 겪어왔을 것이다. 그들에게 ‘오래 전 일을 들추어서 무엇 하느냐’는 힐난보다는, 용기를 낸 그들에게 지지가 필요하다. 마음의 상처를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얼어붙은 마음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공감과 건강한 응원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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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신재현
편집_박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