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파리 사냥’

한국 민족운동의 대명사 ‘3.1운동’
3.1운동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민족운동의 대명사’이다.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언급하면 그 선언서에 서명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 남강 이승훈, 만해 한용운 등 ‘민족대표들’의 이름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유관순 열사는 물론 3.1운동의 발원지였던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과 제암리 사건도 기억된다.

3.1운동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어 약 3개월 동안 1,500여 회,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동참했다. 이는 전 세계의 어느 독립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큰 규모였다. 3월에는 서울과 평안도 지역에서 3.1운동을 이끌었고, 4월에는 경남 지역에서 가장 활발했다.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초기에는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 노동자, 상인 등 전 계층이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농촌, 산촌 등의 시위는 서당 훈장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식민통치 패러다임의 전환 ‘문화통치’
당시 3.1운동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제는 1919년 8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경질하고, 사이토 마코토(齎藤實)를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했다. 사이토는 식민지 통치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수정했다. 이와 함께 헌병 경찰제도를 일반 경찰제도로 바꾸고, 조선인 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그동안 철저히 금지해왔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도 상당 부분 허용했다. 그러나 해군 급사에서 출발해 일본 해군의 일인자가 된 사이토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었다. 그는 유화정책과 함께 조선인 친일파를 지원하고 양성했다. 조선인들을 분열시킴으로써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문화통치’는 겉으로는 일제의 반성과 조선인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3.1운동으로 인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통치방식의 변경에 불과했다.

1919~1920년 콜레라 창궐, 문화통치를 뒤흔들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과 이듬해 1920년,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기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1919년 환자 16,915명 중 11,084명이, 이듬해 24,229명 중 13,588명이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이 각각 65.4%와 56%에 달했으니, 일단 걸렸다 하면 절반 이상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조선인들은 콜레라에 전염된 식구와 이웃을 돌보다 눈물을 삼키며 산으로 피신해야 했고, 총독부의 강압적인 방역조치로 감내하기 힘든 수모를 겪어야 했다.

△ 콜레라환자 임시 격리병사(1919, 황해도 겸이포).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위생경찰이다.

총독부는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긴급 방역대책을 세웠다. 일단 전염지역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소독과 함께 환자 수용소를 지었다. 육로와 해로 등 모든 경로마다 검역을 강화했다. 감염이 안 된 사람들에게는 서둘러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전염지역 최일선에서 방역활동을 주도한 이들은 ‘위생경찰’이었다. 평상시 위생경찰은 광범위한 위생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종두, 전염병, 풍토병 예방 관련 사무, 아편 금지 업무, 음료수 및 도축 판매 영업 허가, 검사, 단속 업무, 매음부 건강검진, 광견병 예방, 행려병자와 정신병자 관리 등을 전담했다.

△ 동네 주민 콜레라 예방접종(1920, 인천)

그렇다면 총독부가 적극적으로 콜레라 방역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전염병은 급속하게 또는 만성적으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생명까지 잃게 만든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큰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전염병을 완벽하게 예방하고 퇴치해온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전염병이 창궐하면 집권세력으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반체제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총독부로서는 ‘문화통치’를 통해 가까스로 국면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시점에서 콜레라의 창궐로 조선인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조선인들 사이에서 제2의 3.1운동이 일어날까봐 우려했기 때문에 콜레라 방역에 힘쓴 것이다.

총독부, 파리와 전쟁을 치르다
1919년과 1920년, 두 차례에 걸쳐 콜레라의 습격을 받은 총독부는 1921년 여름 각종 병균을 옮기는 원인으로 파리를 지목하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야말로 ‘파리와의 전쟁’ 수준이었다. 파리를 잡아오는 이들에게 현상금이나 파리채, 파리약, 파리 잡는 끈끈이 등을 나눠주었다. 박멸주간이나 박멸의 달을 정해 파리를 집중적으로 잡게 했다. 파리 전람회와 위생 활동사진회도 열었다. 관제 언론은 어느 지역에서 파리를 몇 섬이나 잡았는지 보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총독부 행정당국의 파리박멸운동은 진정성이 없는 전시행정에 불과했다. 이 점을 일제 강점기 조선의 대표적 원로였던 윤치호(尹治昊)의 일기를 통해 확인해보자.

“얼마 전 당국이 경성부청(京城府廳)으로 파리를 잡아 가져오면 한 마리 당 3리(厘)를 주겠다면서 파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파리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오자, 당국은 돈을 주겠다던 당초 약속의 이행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파리 한 마리에 그토록 많이 보상해주겠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중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파리박멸운동은 그 자체 만으로만 본다면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당국은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동네에서 오물과 쓰레기가 몇 주 동안 쌓여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치우지 않고 있다. 파리 박멸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겠다면서 파리의 온상은 손대지 않고 방치하는 정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윤치호의 일기, 1921년 5월 28일)

△ 일제강점기의 파리박멸운동 전단

결국 1919년과 1920년 연이은 콜레라의 창궐에 놀란 일제에게는 일종의 ‘사냥할 마녀’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파리였다. 일제는 이 이벤트를 벌이다 어이없는 에피소드들만 남기고 말았다. 파리박멸운동보다 더 중요한 공공변소, 공공 하수시설, 전염병환자 전문 치료기관 등을 늘리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총독부는 보건위생에 무관심했던 점을 반성하기는커녕 콜레라 유행의 원인을 파리와 함께 조선인들의 미개한 위생 관념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지역마다 위생조합을 만들어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것이 보건위생분야에 나타난 ‘문화통치’의 실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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