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명화]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의 기록②, 클로드 모네

<수련> 1906년 (출처: Wikimedia Commons)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모네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가족과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르 아브르(Le havre)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모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네는 자신이 그린 캐리커처를 액자가게에 전시하게 된 인연으로 가게 주인이자 화가인 외젠 부댕을 만나게 된다. 부댕은 모네를 야외로 데리고 나가,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훈련을 시킨다. 항구도시인 이곳은 급변하는 날씨에 따른 풍경의 변화를 관찰하기에 적합했다. 이 과정에서 모네는 네덜란드의 화가 바르톨드 용킨트를 알게 된다. 모네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야외에서 외광을 묘사하는 방법과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화법을 배우게 된다.

이후 모네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글레르 아틀리에에 들어간 모네는 이곳에서 인상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르누아르, 바지유와 시슬레 등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된다. 이들은 종종 아틀리에 근처에 있는 퐁텐블로 숲 속에서 풍경화를 그리고는 했다. 이때 모네는 화가 밀레와 코로 등과 마주치면서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배우게 된다.

*바르비종파: 19세기 초 산업화와 정치적 갈등 등으로 혼란스러운 파리 도심을 빠져나와 순수한 자연 풍경을 그리고자 한 화가들. 퐁텐블로 숲 인근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1867년 모네는 그의 애인이자 모델인 카미유 동시외의 사이에서 아들 장을 얻는다. 3년 후 카미유와 결혼한 모네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아르장퇴유에 거처를 마련한다. 모네는 이곳의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다.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꽃밭> 1873년, <왼쪽으로 돌아선 여인> 1886년 (출처: Wikimedia Commons)

모네가 1873년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꽃밭>을 보면 기존의 회화와 인상파 회화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과거 화가들은 풍경화를 그릴 때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화실로 돌아와 기억에 의존해 색을 칠했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순간을 중시했다. 매 순간 변화하는 풍경을 표현하려 했던 그들은 스케치를 할 겨를이 없었다. 스케치를 생략하는 인상파의 화법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그림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선이 아닌, 색과 밝기가 다른 붓으로 형태를 그렸기 때문이다. 짧고 끊기는 듯한 붓 터치를 사용해 빛과 그림자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표현했다.

1973년 모네는 인상주의의 모태가 된 무명예술협회를 조직하고 그룹전시회를 연다. 이 때 그는 르아브르 항구의 해돋이 풍경을 그린 <인상, 해돋이>를 출품한다. 이 그림은 태양이 떠오르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색의 향연과 안개에 둘러싸인 배의 희미한 윤곽을 표현하고자 했다. 캔버스에는 해가 떠오르는 순간이 거친 붓 터치로 담겼다. 이 그림을 두고 비평가들은 혹평했다. 한 비평가는 그림의 인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모네를 ‘인상주의자’라며 조롱했다. 인상주의와 인상파라는 명칭은 이렇게 탄생했다. 모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인상파라는 이름이 싫지는 않지만, 이름이 유래한 계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괴롭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후 모네는 1886년까지 전시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며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인상, 해돋이> 1872년 (출처: Wikimedia Commons)

1876년 모네는 훗날 두 번째 아내가 될 알리스 오슈데를 만난다. 그녀는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아내였다. 에르네스트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하고 자취를 감추자 알리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네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카미유가 사망한 후 모네와 알리스는 연인이 된다.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이사한 두 사람은 1892년 에르네스트가 사망한 후 결혼해 부부의 연을 맺는다.

모네는 1890년부터 하나의 주제를 정해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건초더미>와 <포플러>, <루앙 대성당>, <수련>이 대표작들이다. 이 중 <건초더미> 연작은 빛에 따라 윤곽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건초더미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오묘한 빛과 색이 건초더미에 투영되어 캔버스에 담겼다. 모네는 건초더미를 주제로 2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건초더미> 1888~1889년, 1890~1891년 (출처: Wikimedia Commons)

폴 세잔은 세심하게 빛의 변화를 잡아내는 모네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모네는 빛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시력은 잃어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태양을 직접적으로 본 탓이었다. 모네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게 된다.

모네가 앓은 백내장은? 
백내장은 수정체가 혼탁해져 빛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는 질환으로, 시야가 뿌옇게 보이게 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6년 백내장으로 진료를 받은 인원은 126만 3,145명에 이른다. 이중 60~70대가 전체 진료인원의 71.6%를 차지했다.

1893년 지베르니로 이주한 모네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작은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었다. 모네는 이곳을 배경으로 수련의 뿌리와 수면에 비치는 반사광을 관찰해 <수련> 연작을 그린다. 그 수가 무려 250여 점에 달한다. 이 연작은 전경을 담는 일반적인 풍경화와는 거리가 멀다. 캔버스에는 오로지 연못의 수면만이 보인다. 정원의 전경에서 연못으로 옮겨온 모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짙푸른 연못 위에는 고운 색감의 수련이 한가득 피어있다. 흡사 피어나는 봄의 정원 같다.

  

<수련> 1908년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시기에 모네는 백내장으로 인해 제대로 색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가 한평생 좇았던 빛과 색에 대한 인상은 더 이상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인상은 그의 내면에 존재했다. 그는 내면의 인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 백내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모네는 1926년 지베르니의 자택에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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