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강점기 결핵의 유행과 크리스마스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인 결핵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다.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 영양 결핍자,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빈민 등이 많이 걸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가, 음악가 등 창작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나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잘 걸려 ‘천재와 미인의 병’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영양상태가 나쁜 조선인들은 쉽사리 결핵균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결핵 환자는 대략 40만 명. 해마다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4만 명 정도였다.

홀(Hall) 가족의 지극정성
1890년 미국 뉴욕의 빈민가. 캐나다 출신의 홀(William James Hall)과 미국 출신의 여의사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의료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셔우드는 미국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위촉되어 ‘미지의 나라’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듬해에 홀도 미국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곧 조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홀 부부(1890년대)

홀은 평양지방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평양 선교는 결코 쉽지 않았다. 평양 주민들의 외세 배척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평양 감사를 비롯한 관리들과 주민들이 조선인 개신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던 중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생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 격전장이었던 평양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의 인명피해가 잇달았다. 홀은 영국영사관의 철수 권고도 뿌리치고 혼신을 다해 조선인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나 그는 과로로 쓰러진 후 당시 조선에서 많이 발생하던 말라리아에 걸려 숨지고 말았다. 조선에 온 지 3년 만이었다. 평양의 교회와 시민들은 성금을 모아 홀을 기리는 뜻에서 글자 그대로 ‘기홀병원(紀笏病院)’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평양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훗날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했다.

한편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로제타 셔우드 홀. 남편을 빼앗아간 조선이 싫어서 미국으로 돌아갈 만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의 보구여관(후에 동대문부인병원)과 평양의 광혜여원에서 여성 환자 진료에 전념했다. 관립이든 사립이든 의과대학에서 여학생을 받아주지 않던 그 시절, 조선인 여의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의 시각장애인들의 진료는 물론 점자책을 이용한 특수교육에 헌신하기까지 했다. 조선과 조선인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 셔우드 홀(1930년대)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아들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성장했다. 열세 살 때인 1906년 8월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원산에서 온 미국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 A. Hardie)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았다. 미국에서 사업가가 되려고 했던 그는 미국에서 결핵 전문가가 되어 조선에 돌아와 의료선교사로 일할 것을 결심하였다. 즉 조선에서 결핵퇴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침내 1928년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전염병 결핵
결핵은 1882년 로버트 코흐(Robert Koch)가 결핵균을 분리해내면서 세균이 전파하는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환자가 뱉은 가래가 마르면 그 속의 결핵균이 공기 중에 날아다닌다는 설명은 대중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도시화로 결핵균은 전보다 더 빨리 퍼질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4호로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학교, 병원, 공장, 극장, 음식점, 이발소, 기차역 대합실 등 다수가 모이는 곳마다 가래침을 뱉을 수 있는 타호(唾壺)를 비치하도록 했고, 객담이 말라서 균이 날아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소독액이나 물을 넣게 했으며, 환자로 판명된 이들은 격리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대응은 이와 같이 관련 법규를 제정하고 기초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데 머물렀다.

△ 해주 구세요양원 의료진(1929), 해주 구세요양원에서 요양 중인 결핵환자들(1930년대)

적극적으로 결핵 치료책을 모색한 것은 선교병원들이었다. 세브란스병원, 미국감리회 소속의 해주 구세요양원,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함흥 제혜병원, 천주교의 성모병원 등이 결핵환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셔우드 홀이 1928년에 세운 해주 구세요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으로 결핵 퇴치의 상징적인 기관이었다.

일제강점기의 크리스마스실 : 거북선, 남대문, 금강산
1932년 셔우드 홀은 조선인들에게 결핵퇴치운동을 홍보하고 결핵환자 치료자금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일본인 관리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대해 적극 동조해주었다. 셔우드 홀은 직접 크리스마스실을 도안하면서 한국인들의 열정과 가능성을 고취할 수 있는 그림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점을 떠올렸다. 도안에서 거북선이 국가의 적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도록 대포를 배치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는 거북선 도안에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날 일본군의 패전을 떠올린 것이다. 결국 셔우드 홀의 거북선 도안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셔우드 홀은 심사숙고 끝에 서울의 남대문을 새 도안으로 결정했다. 그는 남대문을 결핵을 방어하는 보루로 설정했다. 마침내 1932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도안(1932),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크리스마스실(1932)

셔우드 홀은 해마다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조선의 10대들이 팽이를 돌리는 모습, 연을 날리는 모습, 널을 뛰는 모습, 그네를 타는 모습 등을 담았다. 특히 1933년 두 번째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을 때는 200조각짜리 퍼즐을 함께 발행했다. 1936년 크리스마스실 발행 5주년 때에는 기존에 발행된 다섯 장을 함께 묶어 소형 시트를 발행했다. 1937년에는 엽서를, 1939년에는 목판인쇄 연하장을 함께 발행했다. 1940년에는 영국의 저명한 판화작가인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ieth)에게 도안을 의뢰하여 인쇄까지 마쳤는데, 총독부가 이를 모두 압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배경으로 들어간 산이 금강산을 연상시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는 것, 연도를 일본식 황기(皇紀, 2600-2601)로 쓰지 않고 서기(西紀, 1940-1941)로 나타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 크리스마스실 목판인쇄 연하장(1939), 압수당한 크리스마스실(1940)

크리스마스실 발행을 향한 셔우드 홀의 열정 고민, 그리고 다양한 시도는 우리나라 크리스마스실 발행의 역사와 결핵퇴치운동의 역사는 물론 일제강점기 사회문화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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