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나병과 소록도

1960년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특수효과상 등 11개 부문을 석권한 명화 중의 명화 ‘벤허’. 20세기 최고의 종교영화로 유명하다. 특히 15분 정도에 달하는 전차 경주 장면은 배경음악 없이 관중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만으로 박진감과 긴장감을 표현한,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나병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과 여동생 티르자는 악역 멧살라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나병에 걸리고, 나중에는 벤허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나환자 마을의 골짜기로 가서 숨어 지낸다. 이들의 겉모습도, 주거환경도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 영화만으로도 나병은 참혹한 병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천형(天刑)이라 불린 질병, 나병
나병은 나균(癩菌)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전염병이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Gerhard Armauer Hansen)이 원인균을 발견해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눈썹이 빠지고 피부와 근육이 문드러지는 것이 주요 증상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불렀다. 전 세계적으로는 천형(天刑), 즉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까지 했다. 나환자들의 모습이 흉하다는 이유로, 나병이 접촉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는 오해 때문에, 심지어 나환자들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헛소문 때문에 나환자들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전염병을 둘러싸고 ‘격리’라는 사회적인 통제가 시작된 첫 사례였다. 나병 발생이 극에 달했던 13세기 무렵, 유럽에는 무려 13,000여 개의 전용병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1910년경 한국에서 나환자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당시 전 인구의 0.2% 정도였다. 나환자의 대다수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흩어져 있었으며, 2/3 정도는 남자였다. 1928년 공식 통계에 따르면 나환자는 6,782명이었는데, 실제로는 15,000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당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죽을 때까지 문전걸식하면서 유랑 생활을 해야 했으며, 걸인에서 도둑이나 범죄자로 전락해 갔다.

부산, 광주, 대구의 개신교계 나병원

(왼쪽부터) 1920년 광주나병원 환자들, 나병 치료제 대풍자유의 원료인 대풍자 씨앗

한국에서 가장 먼저 나환자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은 이들은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남부지방에 3개의 나병원을 설립했다. 먼저 미국북장로회가 부산에 나병원을 세웠다. 1909년 나환자 치료를 시작했고, 1911년 나병원을 정식 개원한 후 이듬해에 ‘상애원(相愛園)’으로 명명했다. 1916년부터 호주장로회가 상애원을 단독 운영했다. 둘째, 미국남장로회가 광주에 나병원을 세웠다. 1909년 여성 나환자를 벽돌을 굽던 가마에 수용하여 첫 치료를 시작한 후, 1911년 정식으로 나병원을 개원했다. 그런데 이 나병원이 광주 도심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1926년 순천과 여수 사이의 율촌으로 이전했고, 명칭도 ‘애양원(愛養園)’이 되었다. 셋째, 미국북장로회가 대구에 나병원을 세웠다. 1915년 처음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1917년 병원 건물을 완공했다.

부산, 광주, 대구의 나병원들이 주로 사용한 치료법은 전통적 방법인 대풍자유(Chaulmoogra Oil) 복용과 1917년 이후 발명된 주사요법이었다. 부산 상애원의 경우 1916년까지 수용자 사망률이 25%에 달했으나, 1920년경에는 7% 내외로 격감되었다. 광주 나병원도 많은 사람들이 완쾌되어 퇴원했는데 재발하여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환자들이 의학 훈련을 받고 조수가 되어 간단한 주사와 수술, 조제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격리, 고립의 땅 소록도

  소록도자혜의원 본관(1916년 개원 당시)

전남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 그곳에 면적 4.42km2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소록도(小鹿島)가 있다.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을 봐도, 경치를 봐도 낭만의 장소 같지만 이곳은 다른 한편으로 격리와 고립의 장소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이곳에 나병 환자들을 모아서 격리, 고립시켰다. 그래서 소록도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나환자들의 애환이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총독부는 소록도에 나병 전문병원이자 나환자 수용소인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설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수용인원은 많지 않았다. 1928년 개신교 나병원 3곳의 수용인원인 1,750여 명인데 비해 소록도는 250명에 불과했다. 총독부가 소록도자혜의원의 규모를 대폭 확대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이때 총독부는 재정 지원을 대폭 늘렸고, 일본 국왕에게 하사금을 받았으며, 한국 부호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두었다. 그 결과 1938년 소록도에는 4,819명, 3개의 개신교 나병원에는 2,054명의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총독부는 나환자들을 사회에서 격리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공중위생을 물론 치안까지 확립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각 경찰서장은 감염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검진하고 출입지역을 제한할 수 있었다. 도지사는 환자의 직업을 제한하고 요양소에 강제 수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일단 소록도자혜의원에 들어온 환자는 병원장의 강력한 단속 아래 평생 격리된 채 살아야 했다. 소장 등 직원의 판단에 따라 환자들 징계와 감금도 빈번했다.

소록도에서 일어난 이춘상의 의거

조회에 참석하여 훈시하는 스호 병원장(1935)

1933년 9월, 경기도 위생과장을 역임한 스호 마사토(周防正季)가 소록도자혜의원의 제4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야망이 컸던 그는 이곳을 세계 최고의 나병원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환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다. 병든 환자들에게 강제노역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기본적인 인권마저 빼앗긴 채 절망적인 생활을 하던 환자들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굶주림과 학대에 지쳐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환자들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 실패했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특히 스호 원장의 오른팔이었던 간호주임 사토(佐藤三代治)는 악랄하기 그지없어서 환자들에게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였다.

일제의 폭압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다. 소록도에서도 전쟁물자 공출이 시작되었다.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어 날랐고, 소나무 숲에서 송진을 추출했다. 그 와중에 스호 원장은 환자들에게 돈을 갹출하여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동상에 절을 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원장 찬가’를 부르게 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1942년 6월 20일 오전 8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환자들이 운동장에 늘어서 있었고, 스호 원장을 태운 자동차가 도착했다. 스호 원장이 조회에서 훈시를 하려고 걸어가는 순간, 한 청년이 “이 칼을 받아라!”라고 소리치며 원장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스호 원장은 차에 실려 옮겨졌으나 이내 죽고 말았다. 스호 원장을 찌른 청년은 한국인 청년환자 이춘상(李春相). 그는 자수하면서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환우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결행한 의거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정에서 스호 원장을 살해하여 여론화되면 일반인들에게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고 개선을 촉구하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 소록도지소에 수감되었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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