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이야기]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의학자 유일준·백인제

경성의학전문학교 정문(1927)

일제강점기의 민족차별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의 일제로부터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은 물론 민족차별 또한 심하게 받았다. 한국인들은 관공리 임용과 승진 등에서 차별을 받았고, 직급과 업무가 같은데도 월급이 훨씬 적었다. 철도, 통신, 세관, 은행 등의 분야는 물론 위생이나 체육 분야에서도 민족 차별을 받았다. 각급 학교의 입학, 학급 편성, 학과목 편성, 입학식과 졸업식 등 중요행사 등에서도 민족차별이 극심했다. 의과대학도 마찬가지였다.

1916년 개교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의 공학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인 학생이 더욱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본인 학생들이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한국인 학생이 입시경쟁을 뚫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수는 더했다.한국인 교수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특히 각 교실의 주임교수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토록 심한 민족차별을 이겨내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임교수에 올라 교육, 연구, 진료에서 많은 업적은 남기고 한국 의학사에 길이 남은 두 의학자가 있다. 바로 세균학자 유일준(兪日濬)과 외과학자 백인제(白麟濟)이다.

일제강점기 한국 세균학계의 전설, 유일준
유일준은 1895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18년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교실과 내과에서 연구와 진료에 매진했다. 그러나 당시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던 교토제대에서도 민족차별은 심했다. 그는 1년가량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1921년 선진의학의 본고장 독일에 건너가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당시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장티푸스균과 적리균의 변이성을 연구하고 마침내 192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 한국인 최초의 세균학자(미생물학자)가 된 것이다. 이어서 1926년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세균학(미생물학) 주임교수로 부임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틀어 한국인 최초로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후학을 지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납두(納豆, 담북장) 연구에 매진했으며, 혈청학 연구에서는 저온 시 혈구응집의 차이를 발견했다.

유일준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1930)

유일준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3년간 당시 의학계의 과제이자 한국인에게 특히 많았던 발진티푸스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발진티푸스 병원체의 인공배양을 연구하고자 수백 마리의 ‘이’를 기르면서 관찰하고 해부했다. 유일준이 실험대상인 ‘이’를 구하고자 실험실 밖에서 쏟은 노력은 더욱 더 기막혔다. 걸인들의 몸에 있는 ‘이’를 돈을 주고 사는가 하면, 발진티푸스가 창궐한 지역에 달려가 환자들에게 ‘이’를 팔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힘겹게 구해서 기른 ‘이’가 영양부족으로 죽어 가면, 자신의 피를 먹여 살렸다. 이 모두가 한국인들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던 발진티푸스를 정복하려는 집요한 노력이었다.

유일준 교수의 세균실습 지도(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유일준 교수, 1929)

그러던 1932년의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익명으로 유일준에게 편지를 보내 ‘구차하다’, ‘위선이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연구의 중단을 건의했다. 그러자 유일준은 누군지 모르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게시했다. “공부할 기회와 연구할 도리만 있다면 만주도 좋고, 아프리카도 좋고, 지옥도 좋지 않은가?” 이 일화는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 회자되었다. 유일준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이학자들의 사표(師表, 학식과 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유일준은 1932년 8월 38세 때 한강에서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요절은 수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의학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스승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최고 외과학자, 백인제
백인제는 20세기 문턱인 1899년 평북 정주(定州)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학자 가문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며, 당대의 필연적 사조인 개화를 적극 수용했다. 그는 1912년~1915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곳으로, 평양 대성학교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주요 기관이기도 했다.

1916년 오산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별명은 ‘공부벌레’였는데, 실제로 3.1운동 발발 직전까지 줄곧 수석을 차지했다. 일본인 교수들도 그의 우수한 두뇌와 학구열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고, 그 결과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 물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도 당했다.

백인제 외과학교실 주임교수(1930)

백인제가 출옥은 1920년은 그의 인생에서 분수령에 해당했다. 상하이로 명명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 설움을 참고 이겨내면서 의학자가 될 것인가. 그는 고민 끝에 의학 공부의 길을 선택했다. 물론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남들은 졸업만 해도 받는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총독부의 ‘보복’이었다. 총독부는 곧이어 당시 의사라면 누구나 싫어하던 마취 일을 맡을 것을 주문했다. 총독부는 그에게 ‘굴욕’까지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총독부의 조치에 굴하지 않고 더욱 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취 일과 의학 연구에 몰두하며 의학 실력을 키웠고, 마침내 1923년 의사 면허증도 받았다.

1928년 4월 백인제는 구루병(佝僂病)에 관한 연구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도쿄제대 의학박사가 된 것이다. 이 무렵만 해도 의학박사란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더 나아가 그는 1928년 6월 1일자로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한국인이 두 번째로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외과에 일본인 실력자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쾌거였다.

백인제 교수의 외과 임상강의 장면(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백인제 교수, 1930년대)

백인제는 1941년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 대표적인 계기가 있었다. 우선 1928년 오산학교 때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이광수의 좌신결핵(左腎結核)을 진단하고, 국내 최초로 좌신적출(左腎摘出) 수술에 성공했다. 제자 백인제가 스승 이광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극적인 사건이었다. 1937년에는 세계 최초로 유착성(癒着性) 장폐색 환자의 폐색부 상부 위관에 공장루(空腸瘻)를 만들어 환자가 기력을 회복했을 때 장폐색의 근치술을 실시해 그 유효성을 입증했다.

백인제는 의학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 의학계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장기려, 이재복, 김희규, 김자훈, 윤덕선 등 수많은 제자들을 한국의 저명한 외과의사로 양성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야유회(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백인제 주임교수, 1939)

1914년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사표를 내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운영했다. 백외과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여서,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1월 그는 자신의 병원을 한국 최초로 재단법인으로 만들어 선각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그는 해방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재건을 주도하고, 조선외과학회 1~3대 회장, 서울시의사회 1~2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백인제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고 말았다.

백인제는 교육, 연구, 진료를 통틀어 일제강점기 한국 최고의 외과학자였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국인 의학도뿐만 아니라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나병과 소록도
>> http://hirawebzine.or.kr/14490
[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강점기 결핵의 유행과 크리스마스실
>>http://hirawebzine.or.kr/14284
[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파리 사냥’
>> http://hirawebzine.or.kr/13965
[역사 속 의료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누구일까?
>> http://hirawebzine.or.kr/13541
[역사 속 의료 이야기] 천연두, 신의 영역에서 의학의 영역으로
>> http://hirawebzine.or.kr/13459
[역사 속 의료 이야기] 괴질, 호열자라 불리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콜레라’
>> http://hirawebzine.or.kr/12984

※ 외부 기고는 본 기관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Visited 34 times, 1 visit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