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3.1운동과 의학도

매년 찾아오는 삼일절은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국경일이다. 그런데 내년, 즉 2019년의 삼일절은 여느 때보다도 그 의미가 더 깊다. 바로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그러니까 1세기가 되는 해인 것이다.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전 계층이 참여해 거족적으로 일으킨 항일운동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독립선언서, 탑골공원, 그리고 손병희, 한용운, 최남선, 유관순 등을 기억할 것이다. 3.1운동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제는 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에서 문화통치(보통경찰통치)로 식민지 통치방식을 전격 전환했다. 또한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중국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고, 최대 민족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3.1운동에 대한 당시 의학도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고 학업에만 열중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안위와 이익만을 추구했을까. 아니면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을까. 이 점을 관립 의학전문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 3.1운동의 선두에 서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에 개교한 관립학교로서,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였다. 교수들은 거의 다 일본인이었고, 학생들도 1924년경부터는 일본인들이 더 많아졌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한국 학생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었고, 의학을 연마해 인술을 베풀겠다는 열정 못지않게 민족의식도 높은 편이었다.

△ 경성의학전문학교 전경(1920년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학교운영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차별을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학생은 5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한국인의 ‘본과’와는 별도로 ‘특별의학과’에 배정되었다. 특별의학과에는 독일어, 해부학, 조직학 등 핵심 교과목의 수업시간이 본과보다 더 많이 배정되었다. 게다가 수업은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 과목) 시간에는 일본식 가치관과 식민사관이 노골적으로 주입되었다. 일본인 졸업생에게는 일본, 한반도, 대만 어디에서나 개업할 수 있는 ‘일본 문부성 지정 의학전문학교’ 졸업자격이 주어졌지만, 한국인 졸업생에게는 한반도에서만 개업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지정 의학교’ 졸업자격만 허용되었다.

△ 경성의학전문학과 외과 수술 실습(1920년대)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191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한국인들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헌병과 순사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했던 한국인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과중한 세금 징수로 인해 경제적으로 더욱 몰락해갔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민족차별을 당해서, 같은 직급에 같은 업무를 담당해도 한국인의 월급은 일본인보다 훨씬 적었다. 교육현장과 사회 일반에서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궤변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 안과 나라 안의 서글픈 현실을 체험하며 민족의식,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선두에 나설 수 있었다.

1919년 2월 김형기와 한위건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 자격으로 학생들의 3.1운동 준비작업에 참여했다. 특히 한위건은 보성전문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학생운동진영의 ‘삼총사’로 맹활약했다. 3월 1일에는 김형기, 한위건, 김탁원, 백인제, 길영희, 나창헌, 이익종, 이의경(작가 이미륵) 등 상당수의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3.1운동의 첫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날 한위건은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익종은 종로 4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을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3월 5일 서울의 제2차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 또한 한위건 등 여러 학교의 학생대표들이었다. 이날 한위건은 “우리가 민족자결에 따라 행하는 이 거사는 결코 경거망동이 아니다. 동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奮起)하라”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했다.

                                            

△ 김탁원의 졸업 후 모습(1920년대 후반)과 수감생활 때의 이익종(1919년)

총독부 문건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서 3.1운동과 관련해 구금된 학생들을 소속 학교별로 분류했을 때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32명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학생 수가 141명이었음을 감안하면, 22%의 학생들이 구금된 것이다. 결국 김형기는 징역 1년, 이익종은 10개월, 김탁원 등은 7개월, 백인제 등은 6개월을 선고받는 등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당시 천도교 교주이자 민족대표인 손병희가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것을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형량이 아니었다. 또한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이 79명이나 되었던 사실에서 학생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 일본인 교수의 망언에 맞서다
1919년 한국인 학생들의 투옥과 퇴학으로 한동안 술렁였던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21년 5월 말 어느 일본인 교수의 망언으로 또다시 항일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武)가 해부학 실습실의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것을 두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국인 학생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면서 한국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는 폭언을 한 것이다. 이에 평소 해부학 수업 때도 민족적 굴욕감을 감수해왔던 194명의 한국인 학생 전원이 구보 교수의 수업을 거부하고, 응당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으면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학교 측은 주동자 9명을 퇴학시키고, 나머지 185명을 무기정학 처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한국인 학생 전원은 자퇴서를 제출하며 맞섰다.

△ 구보교수(1910년대)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타고 금세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우회와 학부형들이 중재에 나섰고, 사이토(齎藤實) 총독마저도 제2의 3.1운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사건 발생 약 한 달만인 6월 28일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 대한 징계조치를 철회하고 구보 교수에 대한 징계를 약속함으로써 수습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구보 교수는 이듬해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정신질환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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