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의학도들의 이야기

흔히 ‘의사’라고 하면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직업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의사가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안위만을 돌보는 직업인에 불과하다고 혹평까지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의사(의학도)들이 많다.

의학도, 이완용의 목숨을 노리다
대한의원부속의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학생 중에는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 있었다. 이재명 의사가 주도한 매국노 이완용 저격사건에 참여한 오복원과 김용문이 대표적이다.

△ 오복원, 이재명, 김용문(왼쪽부터, 1909년경)

1909년 여름 오복원과 김용문은 평양에서 이재명 등 동지들을 만나 거사 계획을 논의했다. 이 만남 이후 오복원은 박태은, 이응삼과 함께 거사에 필요한 자금조달 책임을 맡았고, 김용문은 이완용의 동정을 파악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약 2개월 후인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은 벨기에 황제 레오폴 2세 추도식에서 칼로 이완용을 공격했으나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직후 체포된 이재명은 결국 사형되었고, 오복원과 김용문은 각각 징역 10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오복원과 김용문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


옥중에서 고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인
김용문, 박태은, 오복원 등과 안중근 의사의 동지 우덕순 등을 만났다.
초면이었지만 마치 오랜 친구 같아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정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의병 죄수들에 의하면 뭇 닭 속의 봉황 같은 느낌이었다.

의사들,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쓰다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된 이후 독립운동세력은 만주지역으로 이주해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 김필순 의사이다. 그는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했고, 경술국치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 박서양은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병원 설립을 통한 민족의 구심체를 형성하는 한편, 학교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고, 독립군 군의(軍醫)로도 활동했다.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생인 이태준은 만주와 몽골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는데, 특히 몽골 국왕의 어의가 되어 몽골의 근대 의학 도입에 기여했다.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의 국권을 상실한 날을 이른다. 즉,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 ‘한일합병’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적법한 비준 절차를 무시하고 일제의 강압 속에서 진행된 불법조약으로, 적절한 용어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 김교준(1905년경)

의학교(醫學校,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제1회 졸업생 김교준은 대종교(大倧敎) 제2대 교주 김교헌(김교준의 형)을 따라 중국 길림지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이재명 의거에 참여했던 김용문은 출옥 후 중국 흑룡강성에서 병원을 열고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의학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3.1운동 당시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활약상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의학도의 참여도는 매우 높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의 김형기와 한위건은 학교 대표로 활약했고, 백인제, 김탁원, 길영희 등 상당수의 학생이 옥고를 치르거나 퇴학당했다. 세브란스의전의 이용설, 최동, 배동석 등도 3.1운동의 준비와 독립선언서 배포 등에 힘썼다.

의학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의학도도 많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유상규, 이의경(소설가 이미륵), 나창헌 등이 그러했다.

유상규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했다. 안창호가 결성한 흥사단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고, 안창호의 제자들 중 스승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1936년 환자로부터 병을 옮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1938년 안창호는 지병으로 서거하기 직전 “유상규군의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승과 제자는 한동안 망우리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 유상규(1927)

이의경(이미륵)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되고 지도자들의 분열이 심화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하다.
나창헌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철혈단, 한국노병회, 병인의용대 등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에 힘썼다. 특히 1926년 상하이의 일본총영사관을 파괴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의학도, 해방 전야에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는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도모하는 비밀결사가 여럿 결성되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한국인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4년 김정진, 권이혁, 임광세, 정성장 등 11명의 동기생은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경찰에 발각되어 6명은 체포되고 5명은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으로 한반도 전체가 숨죽이고 있던 상황에서 의학생들이 해방을 앞두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것은 역동적인 독립운동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참여했던 의학생들의 기념사진(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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