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료 이야기] 일제강점기 치과 이야기

입치사와 치과의사의 경쟁
우리나라처럼 ‘방(房)’ 문화가 다양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다방부터 노래방, 전화방, 비디오방, PC방, 게임방, 찜질방까지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있던 ‘잇방’의 정체는 무엇일까? 잇방은 간단한 발치(拔齒)와 보철(補綴) 시술을 하는 곳이었다. ‘이 해박ㄴ 집’, ‘치술원(齒術院)’, ‘입치세공소(入齒細工所)’, ‘구강치아미술원(口腔齒牙美術院)’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잇방의 주인은 입치사(入齒士)였다.

△ 입치사 간판(연대 미상)

입치사는 말 그대로 이를 해 넣는 기술자다. 이 직업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1906년 일본에서 치과의사법을 개정해 입치사들의 영업이 불법화됐다. 발붙일 곳이 사라진 일본인 입치사 상당수가 다음 해인 1907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통감부가 조선에서는 입치사의 영업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선인 입치사도 등장했다. 1907년 서울 종로에서 개업한 최승룡을 비롯해 일본인 입치사의 보조로 일하던 사람들이 잇방을 차린 것이다. 1937년에는 조선의 전체 입치사 182명 중 111명이 조선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치과의사는 입치사보다 10여 년 앞서 등장했다. 1893년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野田應治)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인천과 서울에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그 후 치과병원이 하나 둘씩 늘어났으나, 입치사들이 빠른 속도로 조선 시장을 점유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치과의사들은 입치사 제도를 폐지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아예 입치사와의 경쟁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14년 의사규칙과 함께 치과의사규칙이 반포됨에 따라 정규 치과의학 교육을 받은 치과의사의 우위가 공인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함석태(咸錫泰)가 조선인 최초로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서울에 있던 치과의사는 일본인 4명, 미국인 1명 정도였다.

△ 서양인 치과의사의 출장 진료 광고(독립신문 1899. 5. 5)

조선인 치과의사를 양성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치과의사를 양성한 사람은 선교사 겸 치과의사인 미국인 한대위(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였다. 그는 1909년에 학생을 모아 자기 집에서 치의학 교육을 시작했다. 이어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도 치의과학교를 설립했다. 1915년, 우리나라에 건너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겸 치과의사 쉐플리(W. J. Scheifley, 1892-1958)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 내에 치과학교실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는 1914년 일본인 치과의사 나기라(柳樂達見)가 치과 초대 과장서리로 부임해 치과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총독부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1922년에 사립 경성치과의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2년제 야간 과정으로 시작해서 이듬해에 3년제가 됐다. 1925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졸업생들은 별도의 치과의사시험을 치르지 않고 곧장 치과의사 자격을 인정받아 치과병원을 개업할 수 있었다.
학교 설립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이후 경성제대가 설립되고 조선총독부의원이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자, 1928년 9월 저경궁(儲慶宮) 터에 학교 건물과 부속병원을 지어 이전했다.

△ 경성치과의학교의 세균학 실습(1929)

경성치과의학교는 1929년 4년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31년에는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로 선정돼 졸업만 하면 일본에서도 치과병원을 개업할 수 있게 됐다. 경성치과의학교는 제8회까지 총 17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 중 60%인 103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경성치의전까지 합산하면 1,635명의 졸업생 중 조선인 수는 555명에 그쳤다. 전문학교 승격 이후 학생 정원이 늘어났지만 일본인 입학생의 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1923년만 해도 조선인 치과의사는 7명에 불과했는데, 1942년에는 5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틀니에 놀라더니, 장식으로 금니까지
조선인들의 구강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 대부분이 훌륭하고 진주같이 하얀 치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철은 발달하지 않았다. 외국인들의 발달된 치과술, 특히 국소마취제를 사용한 무통(無痛) 발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치과 전문의가 아닌 알렌도 제중원에서 발치술이나 구강외과 시술을 행했다.
반면 틀니나 보철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은 상당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것이 상식이었던 조선인에게 보철은 굉장히 낯선 물건이었다. 알렌에 따르면, 한 외국인 선장이 주막에서 밥을 먹은 후 입에서 틀니를 빼자 구경하던 조선인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에게 보철 시술을 받은 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린 나머지 의치의 연결 고리에 금 대신 백금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피증은 점점 사라져 갔다. 오히려 돈푼 꽤나 있는 부자와 모양내기 좋아하는 멋쟁이나 기생들 사이에서는 건강한 치아에 크라운 또는 개면금관(開面金冠)을 액세서리 삼아 씌우는 것이 유행했다.
1920년대 이후 치과의사가 늘어나면서 구강 위생에 대한 대중적인 계몽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특히 1928년에는 일본치과의사회가 6월 4일을 ‘충치예방의 날’로 정했는데, 조선에서도 한성치과의사회가 이 행사를 시행했다.

△ ‘충치예방의 날’ 광고(동아일보 1935. 6. 4)

당시 서울 같은 도회지의 아이들은 과자나 사탕 같은 단 것에 노출되어 충치 발생이 늘고 있었다. 치과의사들은 칫솔을 사용하는 양치질을 충치 예방책으로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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